마저 못한 잡다한 이야기들.... He spoke, we wri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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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서....비 중심의 중심성...
오늘 신문을 보니,  촛불정국을 두고 "아웃사이더 폴리틱스"란 말을 하던데.....그것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맴 거립니다.

이번에 새롭게 임명된 정 대통령실장이 한 말인데....최근의 상황을 두고 정치 지형이 "아웃사이더 폴리틱스(Outsider Politics)’로 바뀌고 있다는 해석과 함께 “소통 부재와 정치 불신 그런 것도 하나의 원인인 것 같다”는 나름의 분석을 곁들여  ‘소통 정치'가 필요하다는 해법까지 제시한 모양입니다.

"아웃사이더"란 표현이 가지는 의미가 원래 양가적이긴 한 것인데..... 정실장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한 듯 합니다.   

아웃사이더라 하면,  중심을 지향하는 메인스트림과 구별되는 주변인을 칭하는 것으로.....

한 중심의 주변이란 것은, 보기에 따라서.... 좀더 거시적으로 보면....꼭 주변이 아닙니다. 
  
우리만의 중심이 아니라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중심을 함께 고려해 보면, "아웃사이더(주변인) 중심성, 즉 비중심의 중심성"이라는 것이 가능합니다.  

결국, 무엇이 중심인가는 보기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당연히 무엇이 주변인가도 마찬가지 겠지요.

그런데 실세계에서 이런 중립적, 회색적, 경계적 위치가 중심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사회 집단에서 중심과 주변은 "우리"의 범주에 따라 달라 집니다. 중립적 입장을 가진 사람은 우리의 범주가 상대적으로 넓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극단적 입장은 "우리"의 범주가 좁은 경우라 하겠지요. 범주가 넓다는 것은 희박하다는 것과도 통합니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 의식"과 "패거리"를  만드는데 중립적 입장은 불리합니다. 역으로 "극단" 은 "우리"를 만드는데 유리하지요.  

좀.....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면, 부정적 의미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이런 극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허위적 우리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읍니다. 주변과 중심의 대체가 일어나는 과정의 시작과 끝이 권력입니다. 중심으로 보여지는 그것은 원래 극단입니다. 극단을 극단이 아닌 중심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 "우리 의식"이고 그것이 권력 작용입니다.  이런 허위적 중심은 우리성을 강화하기위해 더욱 더 극단의 모습을 띄게 되지요. 그러면서 진짜 주변이 됩니다.      

정리하면, 중심이 되기위해선, 주변이 되어야 하고, 중심이 됨으로써 진짜 주변이 됩니다. 일종의 역설인데...

길게 설명하기보단..... 남의 박정희 정권과 북의 김일성 정권을 떠 올려 보면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역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적용되고 관찰 됩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남과 북에서 처럼, 중심을 가장한 극단들이 서로 내통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이 내통함으로써 중심적 주변부를 소외시키고 극단의 중심성을 강화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통하는 극단들이 만들어 내는 "중심의 소외(marginalization of the center)" 야 말로 "비극"입니다.     

비극이기에 더할 나위없는 문학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요. 우리 문학에는 이런 비극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소설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 "변방"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저자가 이문열씨입니다. 대하 소설인데, 자신의, 우리의 비극적.....가정사입니다. 
 
이작가 개인의 경험만이 아니겠지요. 아마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이고 경험일 겁니다.

이런 우리들에게는, 소외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메인스트림으로 포장된 극단을 취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고 현실적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광기의 억울한 희생이 되지 않고.... 살아 남으려면 말입니다.


*아래 사진은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 비극적으로 주변화된 중심이라 할 수있는 아나키스트 박열과 카네코 후미코의 사진입니다.









정실장님의 "아웃사이더 정치론"을 생각타가 그만 아나키스트 까지 왔네요. 

그런데 대학교수 출신 대통령 실장은 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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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내부 중심성이 높은 노드가 집단 외부 연결의 정도 역시 높고, 내부 중심성이 낮은 노드들은 내부적으로는 물론 외부적으로도 소외되는 것이 기존의 사회네트워크의 보편적 양상이긴 하지만...그것이 속물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의 특성이긴 하지만...

탈 중심적 횡적 네트워크의 확장이 지속 되고, 그 확장이 계층적이고 수직적 결합을 지양할 수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범주를 중층화 미소화, 극단화 함으로써 포괄적이고 고정적인 경계를 허물 수있다면,     

대체적 중심을 지향하지 않는 비 중심적 경계인의 중심적 역할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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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dal | 2008/06/23 11:56 | 트랙백 | 덧글(0)
팝아트, 팝폴리틱스, 팝저널리즘
예술 또는 비 예술





세상이 그야말로 "팝아트적"....이라고 하면 좀 오바인지 모르겠지만, 

예술만 폼나라는 법 없으니,   좀 확장해서 이야기 해 보면 "팝폴리틱스" 란 개념화도 가능할 듯...

팝아트가 싸구려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닌 듯 위장하는 진짜 싸구려와 구별되는 것 처럼...

싸구려를 지향하는 그래서 진짜 싸구려와 구별되는 정치도...


이름붙이기 놀이 같지만, 같은 의미에서 팝저널리즘도... 팝아카데미도.....


스물 한두살의 추억이 되어 버린 "다다" 운동의 반 예술 보다는 좀더 동양적 무위의 향기가 팝아트에...

by sodal | 2008/06/23 11:27 | 트랙백 | 덧글(0)
표현의 욕구 & 보는 기쁨

여기 있는 모든 다른 글 처럼 완결성을 갖춘 글이 아니라 그냥 담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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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시위

이번 촛불 시위와 관련해, "표현의 욕구"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을 규정하고, 묘사, 표현, 전달하려는 욕구,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 설명하려는  욕구, 그런 표현의 욕구 말입니다.  


마이크로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저널리즘역시  개인들의 증대된 표현의 욕구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표현의 욕구는 어떤 무의식적 기쁨과 관련되어 있읍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는 기쁨"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보고 나 자신을 보는 기쁨 말입니다. 보여 주고 보여 지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인터넷이야 말로 이런 기쁨이 교차하는 네트워크입니다. 내가 본것, 타인이 본것,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시선, 그들의 실시간적이고 초공간적 중첩이 만들어 내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과 자아에 대한 메타텍스트와 메타 의미,


그 시선의 네트워크. 기록의 네트워크, 의미의 네트워크가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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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기쁨


‘보는 기쁨’은 두 가지 무의식적인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관음증과 나르시시즘이 그것인데, 전자는 기쁨의 원천 즉 보는 대상이 남(他)이고 후자는 자기(我)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를 들어 설명하면,  영화관안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그런 것처럼 연기하는) 극중 인물들의 사적인 면을 훔쳐봄으로써 얻는 것이 관음적 욕구 충족입니다. 나르시시즘은 이와는 달리 영화 속에서 상상의 자신(我)을 발견함으로써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 기쁨은 관객이 영화 속의 연기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얻어집니다.  두가지 모두 절대자, 절대적 존재로 부터 유리된, 결핍적 존재일 수 박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기반한 욕구이자 기쁨입니다. 시선의 대상인 인간이 시선의 주체인 절대자 노릇을 흉내냄으로서 얻는 기쁨이 "보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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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젼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텔레비젼에 내가 나오면 왜 좋을 까요.  보여지는 기쁨이라고 하겠는데.... 타자의 시선으로 객관화된 자신을 본다는데 기쁨이 있읍니다. 보여진다는 것(또는 그 의식)은 타자의 시선을 빌어 자신을 보는것입니다. 보여지는 기쁨 역시 보는 기쁨인게지요. 보여짐에 대한 의식의 결과가 곧 표현입니다. 인터넷에 게시물을 올리고 나면 게시자 스스로 끊임없이 그것을 보게 됩니다. 표현된 자신인데, 타자화된 자신을 보는 기쁨입니다. 표현은 어쨌든 보여지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보든 남이 보든 말입니다. 표현의 욕구는 보는 기쁨으로 완성되는 거지요.  

     

이런 ‘기쁨’을 손쉽게 제공하는 매체가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의 익명(匿名)성과 차명(借名)성이 관음증과 나르시시즘을 발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나와 타자를 표현하려는 욕구와 그것을 보는 기쁨을 줍니다. 미국의 유튜브나 트위터, 우리나라의 싸이월드 처럼 게시자의 나르시시즘과 방문자의 관음즘에 소구하는 서비스들을 인터넷에서 쉽게 발견할 수있읍니다.


본질적으로 "시위"란 것도 이와 유사한 욕구에 소구합니다. 표현의 문제이기도 하고, 시선의 문제이기도 하고,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당연히 그렇습니다. 저널리즘도 크게 마찬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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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권력


Seeing is believing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도 가능합니다. Believing is seeing,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은 지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읍니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이해입니다.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보는 행위와 지식의 구성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고래로부터 그래서 “눈”은 “지식”과 “이성”을 상징하지요.


어느 문화권에서나 절대 이성과 진리는 신의 영역입니다. 이집트 상형 문자에서 눈 그림은 신을 상징합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통제하는 하는 것이 지식이고 그 지식과 상호 통제적 관계에 있는 것이 권력입니다. 본다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세상을 규정하는 권력 행위라 할 수있읍니다.


그래서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신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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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던 파놉티콘이니, 시높티콘이니하는 이야기들도 결국은 "Power of seeing"의 문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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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앞 자유 발언대에 올라 "엄마, 보고있지? 나 어쩌구 저쩌구"하는 젊은 처자의 육성을 인테넷에서 접하고나서, 시위가 언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 참 새삼스럽더군요.  

by sodal | 2008/06/06 10:31 | 트랙백 | 덧글(0)
Out of news-New Yorker

신문의 미래에 대한 그 많은 암울한 전망들에 하나 추가.....
광고기반 저널리즘에 대한 대안으로써  public funded journalism 의 가능성과 문제점들을....




And 2008년 4-5월에 본 뉴스의 미래

Corante(Rebuilding media)

Corante(Strange)

Princeton's Future of News

by sodal | 2008/05/18 12:47 | 트랙백 | 덧글(0)
모델링^^
 

 도올 선생의 도마 복음에 대한 글(중앙 선데이, 예수는 어느 나라 말을 했을까?. 2008, 5월 11일)을 읽다가 재미있는 도표를 봤읍니다. 예수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 기록자 도마, 그리고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도올이라는 번역자를 매개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 재현되는 그들과의 소통 문제를 해석학적 맥락에서 다이어그램화 한 것 입니다.  제가 그대로 다시 카피해 봤읍니다 

 그림의 자세한 설명은 중앙선데이를 참조 하시고.... 그림이 좀 깨진듯 한데 클릭해서 보면 괜찮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가기 전에  이 그림을 보다가 (우리 와이프가 제일 싫어 합니다, 주일 아침에 도올 선생 글 보는 것),  이  것을 저널리즘 모델에 맞게 재구성해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새로운 저널리즘"을 설명하는데 유용할 수 있게다는 생각이.. 그래서 했읍니다.   
 
  먼저 저널리즘 모델을 그려보기 전에 일단 그림을 조금더 일반적일 모델도 바뀌 봤읍니다. 

역시 그림이 좀 깨져보이는데, 클릭하면 괜찮습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저널리즘 행위와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시간"이 다르죠.  사건의 시점(A와B)과 기록의 시점(C와 D) 그리고 해석과 토론의 시점(E와 F) 세 시점 사이의 간극이 "역사"에서는 매우 깁니다. 저널리즘은 그렇지 않지요. 역사에서 이 세시점간 상호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건과 기록, 그리고 해석은 별도의 영역입니다. 지난 과거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지극히 현대적인 것입니다. 현대적 인식이고 소통입니다. 그 뿐입니다. 현대의 해석과 과거의 해석이 다르다고해서 과거가 반응 할 수는 없읍니다. 반응이 있다면 그것 역시 현대의 해석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널리즘은 좀 다르죠.   

 
저널리즘 역시 세단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전이가 발생합니다. 다만 그 간극이 역사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번째 단계 (B와 C)가 이미 발생한 사건 즉 첫번째 단계(A와 B)에 영향을 줄 수없겠지만, 많은 경우 사건들은 시간적 연속성을 지니기에 첫번째 단계와 연관된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두번째 단계가 영향을 미칠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세번째 단계와 두번째 관계 역시 마친가지입니다. 역사에서 기록과 해석의 시간적 간극은 매우 넓습니다. 저널리즘의 경우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 기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명력을 잃고 "해석"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To be continued----  
 

by sodal | 2008/05/12 17:46 | 트랙백 | 덧글(0)
팬카페에서 무슨 이야기들을? 펜카페로 세상을 보는 방식
10대들의 연예인 팬카페에서, 연예인 관련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요? 사실 너무나 당연한 건데. 잘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소통하는 방식이 과거 우리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 터인데, 실상은 알려진게 별로 없읍니다.

"팬카페 저널리즘"이라고 이름 붙여 볼까요? 카페 정당, 카페 저널리즘, 그리고 그들의 연대, 머 그렇게 되는 거지요^~^

촛불집회에 나온 10대 여학생 아이들...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마이너리티라 할 수있었는데. 공적 의견의 시장에서 말입니다.

하여튼 드라마틱합니다. 그놈의 광우병에대한 잡생각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리네요.  
by sodal | 2008/05/12 16:44 | 트랙백 | 덧글(0)
광우병에 대한 잡생각
#공포 사회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월레 소잉카는 그의 저서, "공포의 계절(The Climate of Fear)"에서 공포를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통제력을 온전히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감정”이라며 사람들의 자존심이 훼손되고 ‘굴욕’을 느낄 때, 공포는 급속하게 확산되고 집단화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집단적 공포가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 중의 하나라고 그는 봅니다. 아프리카 출신인 그가 서구 지배적인 현대 사회를 보는 시각이지요.

 집단적 공포는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키고 정상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기에 사회병리적 문제라고도 할 수있습니다.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이런 공포라는 개념이 잘 들어 오지 않는다면 분노라고 해도 좋겠지요.  분노는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요. 

#공포의 심리학
분노나 공포는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느끼는 공포와 결핍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주요 테마죠. 사회과학자들에게도 공포는 중요합니다. 정치학자들은 "대중의 공포와 분노" 를 이용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기도 합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부터, 러시아 혁명, 나찌즘과 마오이즘 까지 이 문제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죠.


미디어를 연구하는 언론학자들 역시 공포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공포가 집단화 되는 과정에서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1938년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우주인이 쳐 들어 왔다"는 황당한 뉴스가 만든 공포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는 유명합니다. 사회켐페인 전문가들에게도 "공포"는 설득을 만드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AIDS에 대한 공포를 이용 콘돔사용을 권장한다는지, 폐암에 대한 공포를 이용 금연을 유도한다든지 그런 것 말입니다.  설득을 만드는 강력하고도 선정적 도구, 그것이 공포입니다.

집단 정체감
이런 분노와 공포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집단 정체감과 관련해 더욱 폭발적으로 분출됩니다. 911이후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이라는 상호 대립적 정체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대립적, 갈등적 정체감은 911이후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극복이 쉽지 않은 겁니다. 서구가 동양을 보는 시각인 오리엔탈리즘이란 것의 이면에도 이런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공포는 상호작용적입니다. 

최근의 올림픽 성화 봉송 중 중국 청년들이 보여준  집단적 공격적 경향도 그들을 없신여기는 서구/또는 한국(작은 서구) 사회에 대한 공포, 분노와 함께 올림픽 개최를 계기기로 고양된 중화인으로써의 자부심과 민족적 정체성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티벳문제는 당근 불구덩이 속 화약이지요. 지구상의 작고 큰 민족주의는 이런 분노와 공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인터넷이라는 매체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옳은 소수를 쉽게 발견할 수있고, 그래서 자신과 다른, 옳지않은 생각을 가진 문제있는 다수에 대한 분노를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인터넷입니다. 집단 동조성을 연구한 "애쉬의 실험"을 떠올려 보세요. 혹자에게는, 현실에서 다수에게 무력하게 따라가는 못난 내가 아니라 비록 소수 의견이라도 자신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얻게되는 쾌감을 누릴수 있는 곳이 인터넷일 수도 있읍니다.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동종애적 집단정체감과 의견의 표현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발현되어 자존심의 훼손, 공포와 분노, 이성과 상식의 마비등으로 이어지게 되면 대립적 타자에 대한 공격등과 같은 비정상들을 낳을 수도 있는 겁니다.  민족의 수준에서도 이런 것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민족주의의 결합, 요즘 신조어로 넷셔널리즘이란 말도 있더군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광우병 논쟁

"광우병" 논쟁이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MBC 피디 수첩이 불을 댕기고, 인터넷이 퍼날르다가 정부가 뒤늦게 뛰어들고, 그래서 사건이 끝모르게 커지자 조중동 포함 모든 언론이, "웬일이니^^" 하며 연일 이 문제를 가지고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 서명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순식간에 백만영이 넘고, 거리에서는 연일 촛불 집회가 열리고 있으니 작은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정부는 기자회견과 신문 광고를 통해 광우병 괴담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내용의 대 국민 홍보를 강화하고 있지만 반대 열기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광우병 논쟁은 글로벌 이슈입니다. 광우병의 원산지는 영국입니다. "광우병" 때문에 유럽에서도 난리가 아니었지요.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도 심각한 무역분쟁이 있었읍니다. 관련해 "미디어와 내셜널리즘"이라는 주제도 당근 있었구요. 일단 이번 이슈를 너무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이겁니다.    


#해석틀의 경쟁

그런데도 우리의 상황은 다른 경우 보다 심각해 보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일차적으로 정부에 책임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매우 휘발성이 강한 이슈였는데 아예 손을 놓고 있었읍니다. 아무 준비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정부의 대 공중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사례라 하겠읍니다. 미국 쇠고기 수입 재개”라는 객관적 사실이 해석되는 틀을 만드는 싸움에서 정부는 수입 반대론자들에게 확실하게 밀렸읍니다. 밀렸다보기는 싸움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읍니다. 정부는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할 것이 분명한 이슈를 포장할 프레임 자체가 없었다고 보입니다. "수입은 이전 정부에서 이미 추진 하던 거였다."  "FTA를 위해 필요하다." 그정도 였지요. 정부의 이런 안이한 생각(또는 프레임)은 반대론자들이 사용하는 프레임에 비해 너무 무력했읍니다.

# 반대론자들의 프레임     

반대론자를 일괄적으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광우병 논쟁의 시발이 되었던, MBC와 여타 방송사들, 그리고 진보적 언론, 이와함께 전부는 아니지만 인터넷의 논리적 누리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프렘임은 두개 입니다.

첫째는 “말 바꾸기 정부”라는 프레임입니다. 이 프레임으로 해석하면, 지난 2일 열렸던 정부합동 기자회견은 불에 기름 붇는 이벤트였지요. 간결하고 명료하지 못했던 기자회견 답변 방식에 대한 지적도 있지만 그것은 지엽말단의 문제입니다. 본질은 “정책 담당 관료들의 말이 그때, 그때 달라요”라는 이미지입니다. 무책임한 정부, 무소신의 정부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이 프레임은 정부 관료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삼켜버립니다.  “사실은, 이전 정부에서 다 결정했던 일이다,” 라는 변명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분노를 부채질하는 대응입니다. 기자회견이나 광고를 통해 어설프게 가르치려 드는 것도 이 프레임을 더 강화합니다. 한 연예인의 표현을 빌면 “국민을 병신으로 알아?” 프레임입니다.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힌 이상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두 번째는 “경제를 위해 국가의 자존심도 포기 하는, 경제 지상주의 정부”라는 프레임입니다. 이 프레임은 사실 정부 스스로 만든 프레임이지요. 이 프레임으로 정권을 잡았다고 할 수있읍니다. 이 프레임이 쇠고기 수입 개방과 결합되면서 브메랑이 된 것입니다. 앞의 거짓말쟁이 프레임처럼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력하지요. 거기다가 일부 몰지각한 대응 때문에 문제는 더욱 증폭 됩니다.  “일본은 20개월 미만의 소만 수입하는데 우리는 30개월 이상 까지?” “미국에서 광우병 환자가 발생해도 수입을 막을 방법이 없는가?”등과 같은 질문에 정부 관료는 시장 원리에 맡기자, 사람을 수입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라는 답변을 내 놓았습니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한 전문가 라는 사람은 영어를 써가며 "이번 기회에 내장 까지 먹은 우리의 식습관이 괜찮은 비해비어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더군요.  부자와 가난한사람이 먹는 쇠고기의 질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장을 먹는 식습관에 위생적이지 않을 수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더 이성적일 수있지요. 그래도 그렇게 대답해선 안 됩니다. 내참...
 
# 대응      

이런 상황에서 광우병 괴담이나 미국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정서가 이성적이지 못함을 지적해 봐야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야당의 정략적 태도를 비난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없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분노와 공포가 쉽게 전파되는 데는 소잉카가 말한 집단적 “자존심의 훼손”과 “굴욕감”이라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읍니다. 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경쟁 프레임
방법은 두개 입니다. 하나는 다른 경쟁적 프레임으로 맞불을 놓는 거지요. 보수 언론이 이번 사건을 해석하는 틀이 그 답이 될 수있읍니다. "괴담, 유언비어 유포 사회"라는 프레임이 그것입니다. "광우병"이 아니라 "광우병 괴담"으로 프레임하는 거지요. 어제  MBC 뉴스데스크에서까지 "괴담" 문제를 거론한 걸 보면 꽤 경쟁력이 있는 프레임입니다. MBC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논리적 문제 제기와  말도안되는 "괴담"을 구분하고싶어 그랬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두고 볼 일입니다.

#바보야, 문제는 자존심이야!
또 다른 방법은 원인을 치료하는 겁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이런 말이 있지요. 바꾸어 보면, "바보야, 문제는 자존심이야!" 라고 말 할수 있겠읍니다. 말로 설득할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줄 구체적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비교되는 일본정부 이상으로 무언가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지요. 어설프게 대통령이 미국 쇠고기 먹고 하는 그런 쇼 말고 말입니다. 감성적인 반미 감정으로 유형무형의 피해를 입는 것은 미국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미선, 효순 양 사건처럼 초동 대응이 미흡해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일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협조할 것은 적극 협조해야하리라 봅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느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래도 남는 질문
그래도 남은 질문은 왜 그들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 청소년들, 교복입고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20세도 안된 그들 말입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까요..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정말 죽는다는 생각, 그런 공포 때문에 대통령 탄핵 서명에 참여하고 촛불 시위에 나오는 것일 까요? 좋아하는 오빠 연예인들이 수입을 반대하니 무작정 따라하는 걸까요? 그들의 자존심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일 까요? 대통령 혹은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메이드인 USA와 그들이 생각하는 미국산이 다르기 때문일 까요? 영어 몰입교육이니, 우열반이니 하면서 짜증 만땅 교육 정책을 쏟아 놓는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진보 정권 10년이 인생의 대부분인 그들이 새롭게 등장한 보수 정권에 대해 가지는 태생적 반감인지.아니면, 정말 공포를 테마로 한 네트워크 게임을 즐기듯, 시사 이슈를 이용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참가자자 처럼,  인터넷에서 광우병 괴담 놀이를 하는 걸 까요?  논술교육 때문이라는 농담같지 않은 농담도 있더군요. 
지금 10대가 우리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는 386의 아이들이라는 점도 나름의 설명이 되는 것 같구요.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요. 그래도 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함의에 대해서도. 신문이라고는 읽을 턱이 없는 그들, 그러면서도 국가적 이슈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표명하는 그들. 놀이의 저널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From 小達, 2008년, 5월 6일



by sodal | 2008/05/06 11:27 | 트랙백(1) | 핑백(1) | 덧글(2)
개인성(Individuality)의 위기
 

#프롤로그 & 할리우드 영화

가끔은 참 괜찮은 할리우드 영화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악명 높은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녹아있는 상당한 수준의 지적 사유들을 발견할 때면, 그들 사회 대중의 전반적 지적 역량에 대해 새삼 놀라게 됩니다.  매트릭스, 트루먼 쇼 등등. 요즈음은 영화 말고도, “위키피디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각설하고...

 



#About the Reality
“여러분, 다시 못 볼지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짐 캐리가 주인공인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태어나 30년을 살아온 공간이 TV 프로그램 세트장이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이 더는 시청자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현실 세계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면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주인공이 세트장의 출구로 연결된 계단의 꼭대기에 서서 시청자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인사하는 대목은 두고두고 기억되는 장면입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스튜디오와 같은 것일 지 모른 다는 생각을 저도 20살 언저리까지 했더랬읍니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그 절대적 시선을 피하기위해, 속이기 위해 짐케리가 한 것 처럼 저도 걸어가다 갑자기 냅다 뛴다든지, 공연을 며칠 앞두고 연극을 갑자기 그만두다든지 하는 예측되지 않는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했었지요. 우리가 주인공 처럼 스튜디오를 벗어날 수없다는 것만 제외하면...쉽게 공감이 가는 그런 영화였읍니다. 

#개인과 타자, 그리고 조물주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른사람들과 매우 다른 존재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짐케리나 저의 돌발적 행동은 자신을 타자로 부터 분리하고 그들을 의심하고 관찰하며 객체화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읍니다. "나는 저들과 다른 존재다. 이 세상은 나라는 주체와 나를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배우들, 즉 타자,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들고 연출하는 지휘자인 조물주 셋으로 이루어져있다. 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나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던 단계에서 "분리된 나"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나에게만 일어 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남들과 다르다는, 특별하다는 그런 인식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나는 남다른 상황에 있다. 나의 고민은 아무도 이해할 수없는 특별한 것이다. 나는 남들과 겉으로 비슷한체 하지만 진실로 정말 다르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모두, every body!!!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모두.  TV 커머셜에서 즐겨 사용되는 카피고 될 정도로...나의 고민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때 쯤, 타자와 내가 진실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때 쯤, 나는 짐케리 놀이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한면 내속에 타자가 있고 타자 속에 내가 있는 그런 걸 어슴프레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 까요.    

파놉티콘
현상과 본질에 대한 관념 철학의 여러 쟁점을 재미있게 풀어낸 "트루만 쇼"는 이 이외에도 현대사회가 배태한 여러 문제를 생각케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권력으로서의 미디어"라는 이슈입니다. 그런면에서 영화는 ‘감시 사회(Surveillance Society)’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닮았습니다. 그 주제는 정보사회에서의 ‘권력과 감시’ 문제에 천착한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고민과도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죠. 다른 점은 오웰이나 푸코가 우리를 지켜보는 ‘빅 브러더’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영화는 한 개인을 감시하는 우리의 문제, 즉 우리가 ‘빅 브러더’라고 얘기한다는 점입니다.


#가역적, 다중의 감시, 시놉티콘 

보이지 않는 괴물 같은 소수가 다수인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오웰이나 푸코의 관점보다는 우리 모두가 감시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현대 인터넷 기반 사회에서는 좀 더 현실적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소수에 의한 감시를 의미하는 푸코의 개념 ‘파놉티콘(panopticon)’에 대비해다중이 소수를 감시한다는 뜻의 ‘시놉티콘(synoptic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전자 멀티미디어 네트워크에 기반한 다중의 감시는 권력을 견제하다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면서도 사적인 개인들에게는 경험해보지 못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타임지 선정 2006년 올해의 인물인 ‘당신들’이 어떤 개인에게는 무서운 ‘빅 브러더’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 유럽의 한 유력 인권단체에서는 “올해의 빅브라더상” 수상자로 “당신들(You)"을 선정한바 도 있습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 나훈아 괴담

얼마 전 가수 나훈아의 공개 기자회견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회견 동영상을 직접 찾아보니, 카리스마 넘치는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과시된 한 편의 ‘나훈아 쇼’였다는 세간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못 보신 분들은 한번 보세요. 강추입니다. 쇼 같은 기자회견도 그렇고, 그 기자회견의 원인을 제공한 “괴담”의 내용도 그렇고 또 그 가상적 이야기가 구성되는 과정도 그렇고 하여튼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이벤트였습니다. 개인 또는 연예인들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비슷한 사건들이 사실 많이 있었습니다. NYT 까지 소개했던 개똥녀 사건도 있었고, 연예인들의 경우는 이루 셀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이번 것은, 그것이 "나훈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경우와 달리, 그가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대 들어(?) 관심을 증폭시킨거지요.     




#진짜 개인(True Individual)

개구쟁이 이미지의 짐 케리와 성적 매력을 무기로 하는 나훈아를 동시에 연상한다는 것이 저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볼 테면 보라고 외치고 카메라 밖으로 비장하게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보니 영화 트루먼 쇼가 문득 떠오르더군요. 다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길러진, 진짜 아닌 가짜 트루먼(True-Man)이 진짜 자기를 찾아 떠나는 것처럼, 나훈아 씨도 그렇게 떠나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야 겠지요.


#Revisiting "Individuality"

“개인성(Individuality)”에 대한 강조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의  핵심 독트린입니다.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공적 영역”이란 것도 개인성에 기초한 사적 영역이 보호 될 때 존립 가능하다고 볼 수있읍니다. 21세기 네트워크 사회에서, 그런 “개인성”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화 시대를 ‘개인(성)의 종말’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개인성”의 방패막이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가 날로 심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켜야 한다는 "개인성"이라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신화일지도 모르니까요. 옛날과 다름에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변화된 세상에 적합한, 필요한 “개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되는 시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개인성" 이란 것은 지켜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되고, 도전,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by sodal | 2008/04/30 17:36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구성주의적 세계

<개인과 집단", "주관적, 사회적 인식과  객관적 현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행위" 등 구성주의적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주요개념들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론적 모형>




네개의 서로 다른, 그렇지만 심각하게 상호 연관성을 가지는 세상

세상(Represented world) : 매개된 세상(Mediated world), 기록된, 텍스트화된 세상(Textualized world), 교육된 세상(Educated world), TV, 신문의 세상, 블라블라 그런 것....세상을 구성하는 지식들, 지식 그 자체가 탐구의 대상

*주체, 개인이 인식한 세상 (Perceived world) : 내가 알고 직간접으로 경험한 세상, 주체의 세상, 주관적 세상!!!

*집단적으로 인식된 세상(Collectively perceived world) :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것이 있다면, 다중의 세상, 사회적 세상!!!

*객관적 세상: 주관적 경험과 관찰 그리고 재현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본질적이고 객관적 세상, 그러한 것이 존재 한다면.  
by sodal | 2008/04/29 17:19 | 트랙백 | 핑백(3) | 덧글(0)
Back to the future-작성중
 

"사회현상" 이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주제"를 탐구하는 근대적 학문의 여러 유파들이 품고 있는 가
장 오래되고, 또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심이 되는 사유 (思惟)가  "개인(의 행위)과 사회(의 구조)"의 상관적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개인(의 행위) 이면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추상적 개념인 “사회” 또는 “구조”란 것의 실재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고, 또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네트워크론의 모학(母學)이라고 할수 있는 "사회 체계론"의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매일 마주하게되는, 목도하게 되는 현상들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것이 우리의 주관적이고 또는 사회적 지각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라도 말이다. "개인"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분명 그 실재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의 실재함에 대해 서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개인" 혹은 그 집합인 "개인들"은 그나마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물리적 형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문서화된 법률, 감옥, 학교 건물, 영토 등 그 실재를 추론할 수 있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단편적 물리적 형상들은 존재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회 그 자체의 실재함을 증거하는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모든 존재는 변한다. 변화를 인지하게 될때 존재를 깨닫게 된다. 사회도 그렇다. 사회가 실재하는 것이란 생각은 사회가 변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보다 분명해지게 된다. 18,9세기 미국과 유럽인 들은 동시대가 그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사회고, 그 변화의 결과로 설명되어야 할, 다시말해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설명하기에는 미흡한 여러 현상들에 주목하게 된다. 개인의 행동이 단순히 개인의 것만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실로 아이러니다. 과거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개인주의적 사회로 바뀌어 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성을 제한하는 구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러나 조금만 신중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모든 이항대립 쌍들은 분리되어선 설명될 수 없는, 공존성(비동시성의 동시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사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공적인 것이 만들어 짐으로써 비로소 사적인 것이 명확해 지고 관심사가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그 변화의 원리에 대해 탐구하는 사회학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사실 근대적 계몽주의가 만든 것은 비단 사회학뿐만이 아니다. 현대 사회를 특징 짖는 많은 주요한 가치들 즉 “개인” “여론” “이성” “자유” “평등” “과학” “시장” 등 역시 근대의 발명품들이다.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학”을 발명한 사람은 실증주의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 1798-1857)로 알려져 있다. 그의 책 ”실증철학강의(1838)“에 ”사회학“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부분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system)다. 이른바 사회 유기체론3)이다. 이 생각은 이후 허버트 스펜서(1820-1903)의 사회진화론과 뒤르켐과 짐멜의 사회 네트워크론으로 연결되고 후에 사회 생물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구조” 대 “사회적 행위” 논쟁에서 구조를 지지하는 학자들이고 초기 사회학을 만든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내가 전통적 네트워크 론이라고 불리는 관점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관점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회 체계(네트워크) 내에서 각각의 부분들에 의해 담당되어지는 “기능”에 주목하는 “기능주의론”으로 이어진다.  


To be continued

by sodal | 2008/04/29 14:35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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