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영화 ‘그랜 토리노’를 봤습니다. 외로이 홀로 사는, 마초 성향이 농후한 외골수 백인 노인과 난민처럼 보이는 동양계 이웃의 갈등과 화해, 우정에 관한 이야기....머 그정도로 정리되는데, 흥행과 작품성 양면 모두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입니다.
인종주의적 관점과 표현이 거침없이 나오지만 종국에 드러나는 위대한 인간애에 사람들은 이 영화를 반인종주의적 영화라고 치켜세우기도 합니다. (아니 사실은, 인터넷 평들을 훑어 보니,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다 그렇게 칭송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개방된 문화인의 자세로, 미국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개인적으로 내게 그랜 토리노는, 매우 불편한 영화였습니다. 매우 불편했던 영화 탑텐에 들어 갑니다.
이 영화의 갈등 축에는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사실 영화에 한국인이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 나오는 사람은 동남아 어느 외진 지역에 살다가 종교기관의 도움으로 미국에 집단 이주한 ‘몽’족이라는 난민들이지요. 그런데 영화에서 이 몽족은 꼭 몽족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인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말갈족이라 해도 괜찮구요. 듣도 보도 못한 몽족의 언어와 의상, 음식이 소개되지만 그것은 몽족이라는 소수 민족의 특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동양성, 동양 같음을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일 뿐입니다.
영화를 끌어가는 중심적 모티프는 주인공인 코왈스키란 노인이 겪는 한국전쟁 트라우마(상흔)입니다. 한국인의 전쟁에 개입해 상처입은 노인의 굴절된, 인종주의적 시선이 영화 전반부를 장식합니다. 중반부는 수줍고 나약한 동양 소년을 보호하고 훈육하는 엄한 아버지의 시선으로, 그리고 후반부로 가며 그것은 다시 학대받는 불쌍한 동양 이웃을 구원하려는 영웅주의적 시선으로 변합니다. 인종주의 시선이 영웅주의가 된 것이니 변화라고 할 것도 아니지요. 목숨을 내 놓았으니 영웅주의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일당 천의 람보 류는 분명 아니지요. 비교를 하자면...헌신공양하는 성자 수준이랄 수 있겠는데...코왈스키의 초 현실적 초인간적 행위가 영화적 감동의 원천임은 분명합니다.
노인과 몽족 갱의 갈등은 한국전쟁의 다른 버전입니다. 몽족과 한국 이미지의 중첩은 그래서 영화적으로 의도된 것입니다. 영화적 은유인 것이죠.
미국 관객이 영화 속 몽족을 한국인과 동일시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은 몽족과 우리자신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구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아쉽게도 미국인이 볼 때 한국적인 것과 몽족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영화 대사에 나오는 것 처럼, 개를 먹느냐 고양이를 먹느냐의 차이 정도지요. 동족 갱에게 두드려 맞고 겁탈당하는 동양계 이웃을 향한 미국 노인의 숭고한 희생을, 그의 구원자적 헌신을, 감사하게만 생각되지 않고, 미묘한 이중적 감정으로 보게 되는 이유는....내가 피 구원자로 설정되어있는, 도움을 받아야만하는 나약한 몽족 같은 동양인, 몽족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인, 한국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돈만 밝히는 이기적인 장사꾼은 약과이고 인신 매매범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붕붕 날아다니는 무술인상은 그나마 긍정적 이미지라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더 아픈 것이지요.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 이미지가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의 한국, 한국인상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생각하면 우울해집니다.
얼마 전 국가브랜드위원회 보고 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고면 보고지 웬 대회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거창하게 한번 노력해 보겠다는 뜻이려니 하고 이해하려합니다. 다만 기대해 보는 것은 행사를 위한 행사가 아닌, 좀 더 실속 있는, 전문가 냄새가 풍기는, 세밀하고 실제적 방안이 강구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 이미지를 개선할 방법이 무엇일까 그런 고민도 좀 하면 좋겠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전문가가 모인 위원회라고 하니 무엇인가 답이 있지 않을 까요?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란 것은 결국 개인이 접하는 문화 텍스트의 모자이크입니다. 그런 문화 텍스트의 중심에 영화가 있음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인 이미지를 개선하면 그것이 열 외교관, 백 외교관 노릇을 하는 것이죠.
몇 년 전 미국에서 단풍 가득한 공원을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한 미국 할아버지가 기억납니다. 내게 단풍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던 그는 한국전 참전 용사였습니다. 한국에서 짧지 않은 청춘을 보냈을 그에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은 한국 이미지와 연결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랜토리노를 보니 이런 분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네요.
*"보수주의자인줄 알았던 클린트이스트우드가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니...놀랍다"는 영화 평이 있더군요. 이 영화가 보수주의적이지 않다면...머가 보수주의적인 것인지....내참....
* 서양이 우리를 바라 보는 바로 그 시각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 여전히 유효한가 봅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랑랑, 라흐마니노프(Lang Lang Rachmaninov)’를 입력하고 동영상 옵션을 클릭하면,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라는 유튜브에서만 라흐마니노프 작곡, 랑랑 연주의 동영상 파일 수십개가 검색됩니다.
클래식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아시겠지만, 랑랑(郞朗)은 요즘 최고로 손꼽히는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입니다. 구글로 검색해 보니, 피아노협주곡 2번도 있고 3번도 있습니다. 악장별로 구분된 파일도 있어 2번 1악장만 골라 감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다른 장소, 다른 시점에서의 연주를 비교해 들을 수도 있습니다. 랑랑이 물리면 러시아의 유명 피아니스트 키신의 라흐마니노프도 있지요. 물론 이 모두가 공짜입니다. 위에 보시다, 들으시다 시피말입니다. 회원 가입도 필요 없습니다. 물론 연주회에서 직접 듣고 느끼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수십만원의 티켓 값을 생각해 보면 일정 부분 대체 효용을 제공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순 대체뿐만아니라 다른 묘미도, 효용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노트북만 있다면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막간에도 원하는 연주를 감상할 수 있으니 편이성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랑랑을 찾다 우연히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무명의 아마추어 연주자가 제공하는 색다른 분위기의 라흐마니노프는 덤.....이상 입니다. Serendipity!!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과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거리를 유지해 왔던 클래식이 부쩍 가깝게 다가온 느낌입니다. 유명 클래식 연주자의 인기는 이미 스타 연예인의 그것 못지않습니다. 인터넷 팬 카페는 기본으로 있더군요. 이들 유명 연주자들의 공연 티켓은 인터넷 발매 수시간 만에 매진되기도 합니다. 공동으로 표를 구매하고, 공연 평을 올리고, 동영상을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하네요. 점잖고 수동적이기만 한 관객 모델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례들입니다. 참여와 협력, 소통을 추구하는 클래식 열렬 팬들이 바로 인터넷을 좀더 문화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주역인것 같습니다. 이들이 활동하는 열린 공간인 인터넷의 클래식 음악은 그래서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랑랑의 라흐마니노프와 키신의 라흐마니노프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를 바로 눈앞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터넷이니까요.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함 비교해 보세요. 카라얀의 베를린 필, 주빈 메타의 뉴욕 필도 더 이상 딴 나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전문가적 안목과 차별화된 고급 취향을 요구했던 클래식 음악이 공유, 개방, 참여라는 가치로 설명되는 웹 2.0 인터넷 문화 속에서 시나브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유튜브가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만든다고 합니다. 사업적 감각이 남다른 유튜브다운 프로젝트입니다. 그야말로 클래식 음악과 인터넷의...... 노골적 접목입니다. 온라인 오디션과 투표를 통해 단원을 선발하는데,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제한 없이 응모할 수 있는 완전 개방 경쟁이랍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동영상 연주 파일을 올려 심사를 받는 거지요. 웹 2.0 분위기가 물씬하네요. 웹 2.0의 가치는 사실 21세기 문화예술의 주요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적으로 소유되고, 분리되고, 소통되지 못하던 문화가 좀더 공유되고, 개방되고, 참여되는 문화로 변해가는 것이 문화 진화의 원칙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문화예술이 지향하는 가치고 문화 2.0의 가치라 할 수있는 거지요. 스탠퍼드 대학의 레식 교수의 말을 빌면, 이른바 ‘자유 문화(Free Culture)’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문화란 통제와 허용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와 공유의 대상입니다. 문화와 인터넷이 그래서 상통하는 겁니다. 클래식과 인터넷의 접목이 장차 창조해 낼 새로운 ‘자유 문화’가 한껏 기대됩니다.
사족: 유튜브에 기대 한다는 것이 아니라.....그런 기대를 이용하는 유튜브를 우리가 이용하는 건데.....그게...누가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건지...에구
The Emergence of Citizens' Media News, Information and the Wealth of Networks Why Newspapers Matter
모든 세션에 비디오, 오디오, podcast 서비스가 제공....
근데 보니까....... 두 번째 세션 패널중에......................"벤클러 교수" 가 있더군요.
함 보시죠. 대박임다.. 좀 길긴 한데..
이른바 저자 직강이네요. 좀,,,,많이 깁니다. 내용도.....그렇고 이해가 쉽진 않지만........
벤클러 교수 발음은 거시기 한데 참 말이 빠르네요.. 하여튼... 인터넷이 좋습니다. 영어가 좀 되면.....집중해 보시고,,, 좀 모자라면......여기 Summary 를 읽어 보시고,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느껴보시고. just feel MIT stuffs.. 따지고 보면,,,별거 아닙니다...머.
인간 행위란 것이, 즉흥적이고, 그때 그때 다른, 어떤 경향성에 지배 받지 않은, 매우 불안정한, 마음대로인 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좀.......생각해 보면......에... 인간 행위란게 보기에 따라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후보를 지지 할 것인가, 말 건가, 투표하러 갈 것인가, 아닌가, 이 사람과 사귈 것인가 말것인가, 결혼 할 것인가 말것인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거짓말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이 프로그램을 시청할 것인가, 저 프로그램을 시청할 것인가, 이 기사를 읽을 것인가, 저 기사를 읽을 것인가, 휴지를 길거리에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자살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과제를 제때에 제출하는가, 마는가....
과제를 제때에 제출하지 않았을 때는 대개 이유(reason)가 있습니다.....과제를 제때에 제출하지 않고서, "전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원래 늦게 제출해요" 이렇게 답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불가항력적인, 또는 예측 불가능했던 어떤 상황과 연관되어있을 겁니다. "갑자기 프린터가 고장났어요" "갑자기 배가 아파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등의 공식적 이유 부터, "어제 친구와 밤새 술을 마셨기 때문에" "요즘 너무 피곤해 숙제할 여력이 없어서" "공부가 싫어서" "다른 과제가 많아서" 등과 같은 감추어진 이유 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이유가 한두개가 아닐 수도 있고. 그래서 특별한 이유를 적시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겁니다. 스스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대체, 내가 왜 그런 거지?" 처럼.
학생들이 생각하는 주관적 이유(reason)가 과제 미제출이라는 행위를 유발한 객관적 원인(cause)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모든 이유가 원인이라면, 어떤 행위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향을 끼 칠수 있는 수많은 예측하기 어려운 요인(이유들)들 때문에, 과제 제출이라는 행위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해도 별 의미가 없는 복잡한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제 제출은 그때 그때, 달라요~"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꼭 그런게 아닐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유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 행위란 것이 주관적 경험, 특수한 맥락과 관련된 것이고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일반화해서 설명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지요. Instable 하고 복잡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조금 더 거시적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때 그떄 다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50명으로 이루어진 클래스의 첫번째 과제에 절반인 25명이 과제를 제때에 제출하고 25명이 늦게 또는 제출하지 않았다고 가정합시다. 제때에 제출한 25명을 A 그룹, 제때에 제출하지 않은 25명을 B 그룹이라고 하고, 다음 과제를 기한 내에 제출하는 학생이 A 그룹과 B 그룹 중 어느 쪽에 많을 지를 예측해 봅시다.
예측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그럼, 세번째 과제는 어떨 까요?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 과제는?
아마도 모든 경우에 있어, A 그룹이 많을 겁니다. 그때 그때 다르지 않습니다. 상당히 Stable 하지요. 예측이랄 것도 없습니다. 만일 한번의 결과가 아닌 두 세번의 사전 정보를 가지고 예측한다면, 더 쉽겠지요.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첫번째 과제를 제때 제출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계속해서 6섯번 모두 제때 과제를 제출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집합적,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달라질 수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행위는 불안정 한데도, 집합적 행위는 안정적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모든 경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Micro Instability, Macro Stability라고 부릅니다.
미시와 거시를 나누는 기준이 명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미시와 거시, 사회학에서 말하는 미시와 거시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략 두 가지 차원을 생각해 볼 수있습니다. 하나는 부분과 전체라는 공간적 차원입니다. 앞서의 예 처럼, 특정 개인의 행위가 아닌 집합적 행위를 논의의 대상으로 할때 일반적으로 "거시적" 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개개인의 행위가 분석의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집합, 집단이 전체로 분석의 단위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반대는 "미시적"입니다.
시간의 범위도 거시와 미시를 구분할 수 있는 차원 입니다. 단기적이냐 장기적이냐 하는 문제죠. 물론 장기적인 것이 거시적인 것입니다. 특정 시점, 특정 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긴 시간 단위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트렌드, 방향성을 읽어내려는 것이 거시적 시각입니다. 특정 시점의 행위는 불안정적이고, 그때 그때 다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행위의 경향성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미시적 불안정성을 넘어서는 거시적 안정성이 없다면, 여론 조사도 불가능 합니다. 아니 모든 종류의 사회조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개인들 차원에서 본다면, 여론조사 답변이라는 것 자체가 오락가락하는 것입니다. 개개인들의 투표행위라는 것도 그날 가봐야 알 수 있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락가락 답변의 집합적 결과라고 할 수있는 "측정된 여론"이 그날 가봐야 알수있는 행위들의 집합적 결과인 "선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있는 것이 바로 이 미스테리한 "미시적 불안정성과 거시적 안정성"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위 뿐 아니라 물리적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시적으로는 불안정하면서도 거시적으로는 안정성이 나타나는 것은...
세차게 흐르는 물, 급류에 낙엽 100장을 띄워 보면 낙엽이 어떻게 될까요? 이리저리 움직이겠지요. 물에 떠내려가는 놈, 물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놈, 바위에 붙어 버리는 놈, 거슬러 올라 가는 놈, 뱅글뱅글 도는 놈, 별놈이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불안정한 낙엽 각각이 10초 동안 어떻게 움직일지, 그 궤적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 까요? 아마도 정확히는 고사하고, 대충 예측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이것이 미시적 불안정성 입니다.
그런데 한 10 분 정도 후 쯤은 어떨까요? 우리들은, 예측대로, 물이 흘러 가는 방향을 따라 원래 지점보다 아랫지점으로 내려가 있는 적지 않은 낙엽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불안정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전체적으로 보면, 가야 할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지요. 이것이 거시적 안정성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거시와 미시의 연관성 또는 그 둘의 통합적 시각에 관한 문제입니다.
"미시와 거시는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니 하나는 불안정 하고 다른 하나는 안정적인 것이다." 이렇게 편하게 말하고 넘어 가면 좋겠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미시적 불안정성과 거시적 안정성이라는 주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미시적 현상과 거시적 현상을 구분해서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그 둘의 미스테리한 연관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은 것 같고...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복잡계 연구자들이 말하는 "창발적 질서"라는 것이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특히 "축척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창발적 질서" 라는 복잡계 연구자들의 주요 명제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미스테리한 연관성을 밝혀 줄 통합적 이해로 나아가는데 그들의 연구가 중요한 토큰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2008년 6월 5일 연합뉴스 기사, 읽어보시고 -------------------------- 휴대전화 사용자 10만여명의 활동 범위를 조사한 최초의 연구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10㎞ 이내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찾아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BBC 뉴스 인터넷판과 AP 통신이 네이처지에 실린 최신 연구를 인용 보도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복잡계 네트워크 연구소 과학자들이 익명의 휴대전화 사용자들을 6개월간 추적한 이 연구는 조류 인플루엔자(AI)와 같은 전염병 확산이나 교통량 예측과 같은 분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개인 사생활 노출과 관련한 윤리성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산업화된 외국'에서 숫자와 문자가 섞인 26자리의 번호로 위장한 600만개의 휴대전화 번호 가운데 10만개를 무작위로 추출한 뒤 중계탑을 통해 사용자가 통화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을 때 위치를 추적하는 조사를 6개월간 실시했으며 두번째 실험에서는 위치 추적장치가 달린 206개의 전화를 1주일동안 2시간 단위로 추적했다.
그 결과 추적 대상자의 대부분은 5~10㎞ 범위 안에서 이동했고 약 4분의 3은 6개월동안 32㎞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근 3%는 규칙적으로 320㎞ 범위를 넘어 가는 '부유층 여행' 패턴을 따르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는 주말마다 240㎞를 이동하는 사람도 있었고 1% 미만은 종종 1천㎞ 범위를 벗어나기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사람들의 이런 움직임이 '거듭제곱 법칙'이라 불리는 수학적 관계를 정확히 따르고 있다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
# 보통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이쩌면 당연해 보이는 현상인데..... 복잡계 연구자들은 이런 것에 열광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듭제곱 분포의 실증적 확인은 새로운 복잡계의 발견와 동일시 되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거듭제곱 법칙의 발견이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데 아직도 충분히 동의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과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왜 특정 현상의 발생 빈도가 정규 분포도 아니고 무작위적 분포도 아니고 아래 그림처럼 거듭제곱 분포를 하는 가? 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기저기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냐 이겁니다. 어? 여기도 그렇네? 저것도? 와! 요것도 그렇잖아? 이거 정말 신기하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질서, 법칙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지요. 상위 20%가 결과의 80%를 차지한다는 파레토 법칙도 거듭제곱 법칙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당연한 것 처럼 보이지만, 예외 없이 그렇게 나타난다면, 당연하기만 한 게 아니라, 무엇인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걸 연구하는 거죠.
An example power law graph, being used to demonstrate ranking of popularity. To the right is the long tail, to the left are the few that dominate (also known as the 80-20 rule).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거듭제곱 법칙보다는 다른 표현인 "멱함수"와 관련해 자료가 많더군요. 아래 블로그에 멱함수를 쉽게 이해할 수있는 자료가 잘 정리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기하 급수 적으로 증가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모양새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상상해 봅시다. 아래 와 같지요...
여기 (복잡계 연구)에서 말하는 멱함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감소하는 함수다 ,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X축의 크기 (강도, 규모, 순위 등으로 측정 된)가 증가할수록, 발생빈도(확률)로 측정되는 Y의 값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는 함수다. 이거죠. 그 그래프는 기하급수적 증가 그래프 상반된 모양새를 취하는 거죠.. 저 위의 위키 그림 처럼
기하급수(거듭제곱)적으로 증가 또는 감소하는 함수의 양변 X와 Y에 로그를 취하고 그래프로 표시하면, 직선으로 나타납니다.
거듭제곱 분포를 보이는 자료를 로그 척도 변형해 직선의 형태를 취하도록 한 그림입니다.
우측 그림과 같은 직선 그래프가 여기저기서 관찰 되니, 그 통계적 질서를 창발적 현상으로 이해 하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좀더, 오리지널 소스에 접근하고 싶다면.....거듭제곱의 법칙과 관련해 아주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미시간 대학, 물리학과 M. E. J. Newman의 "Power laws, Pareto distributions and Zipf's law "라는 논문인데... 논문에 거듭제곱 분포를 보이는 12개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왜 그렇게 거듭제곱 분포에 열광할 까요?" 복잡계 연구와 관련해 인터넷에서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카네기멜론 대학의 Cosma 교수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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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do physicists care about power laws so much? I'm probably not the best person to speak on behalf of our tribal obsessions (there was a long debate among the faculty at my thesis defense as to whether "this stuff is really physics"), but I'll do my best. There are two parts to this: power-law decay of correlations, and power-law size distributions. The link is tenuous, at best, but they tend to get run together in our heads, so I'll treat them both here. ----------
-----------------------------------------------------------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민중은 통일적인 하나임에 반해, 다중은 하나의 통일성이나 단일한 동질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구성되어있는 다수를 의미. 다중은 특이한 차이들의 다양체(multiplicity). 대중 역시 민중과 달리 하나의 동일성이나 하나의 통일성을 환원될 수 없는 온갖 유형들과 종류들로 구성 되어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동일하나,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성이라는 점이 다르다.--- 다중이 퀼트라면, 대중은 회색이다.--- 대중이 회색이라는 누구의 특징도 아닌 획일성으로 연결된다면, 다중은 그 차이를 온전히 간직한 채 연결된다.
-네리리와 하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중 개념에 의해 제기된 도전은 사회적 다양체가 내부적으로는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회색 여론” --------------------------------------------------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대로, 모든 색깔이 합쳐진, 그래서 어느 누구의 색깔도 사라져 버린, 서로 다른 다양한 주체가 그 속에서 모두 익사해 버리는 “대중”의 색깔이 회색임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그 회색 여론이 사회의 동질성을 부각하고 공동체적 요소를 강화하는데 기여함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다중이 민중처럼 동일성이 아니요, 대중처럼 획일성도 아닌 한에서 다중의 내부적 차이는 그들로 하여금 서로 소통하게 하고 함께 활동하게 하는 공통된 것(the common)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공통성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의 소통, 협동, 그리고 협력은 공통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 확장하는 나선형 관계 속에서 공통된 것을 생산하기도 한다.” Negri & Hardt, 2004, p.20.
-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른다면, 시장이야 말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이 시장에서 협력을 낳게 한다는 생각이 자유주의 세계관의 기초임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좌파들은 이런 협력을 의사(擬似: 진짜와 구별하기 어렵지만, 진짜가 아닌) 협력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네그리와 하트도 그런면에서 좌파가 맞네요. 하지만, 그 협력을 가능케하는 "공통성"이 주어지고, 발견되는 "계급적 이해"와 같은 것으로 보기 보다는, 유동적이고, 생산되는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분명 탈 마르크스적 입니다.